점심시간은 늘 전쟁이다. 12시 정각, 숨 가쁘게 사무실 문을 나서는 순간부터 1시까지, 정해진 짧은 시간 안에 허기진 배를 채우고 다시 일터로 복귀해야 하니, 메뉴 선택부터가 고역이다. 특히 을지로는 직장인들의 성지답게 발 디딜 틈 없는 맛집들이 즐비하다. 오늘도 뭘 먹을까 고민하며 인파에 휩쓸리듯 걸음을 옮기던 중, 익숙하면서도 왠지 모르게 마음을 끄는 간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을지로 3가역 9번 출구에서 6분 정도 걸어 들어간 이 골목은, 겉모습만으로는 여기가 50년 넘게 자리를 지켜온 노포라는 사실을 짐작하기 어렵다. 하지만 오래된 간판과 묵직한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마치 시간 여행을 온 듯한 기분이 든다. 낡았지만 정갈하게 정돈된 테이블, 벽면을 가득 채운 오래된 액자들, 그리고 테이블마다 놓인 묘한 분위기의 물통까지. 이곳은 확실히 요즘 유행하는 트렌디한 식당과는 결이 달랐다.

메뉴판을 훑어보니, 이곳의 주력은 역시 ‘닭백숙’과 ‘칼국수’였다. 50년 이상 한자리에서 묵묵히 이 자리들을 지켜왔다는 것이 새삼 대단하게 느껴진다. 오늘 나의 점심 선택은 ‘백숙백반’과 ‘계란 넣은 칼국수’. 혼자 왔지만, 두 가지 메뉴를 맛보고 싶다는 욕심을 부렸다. 보통 점심시간에는 북적거리는 탓에, 메뉴를 빠르게 결정하고 주문하는 것이 필수다.

주문을 마치고 기다리는 동안, 주변을 둘러보니 이미 많은 테이블이 손님들로 채워져 있었다. 혼자 온 사람들도, 친구와 함께 온 사람들도, 동료와 함께 온 직장인들도 각자의 점심을 즐기고 있었다. 이곳은 회전율이 빠른 편이라고 들었지만, 점심 피크 시간대에는 웨이팅이 있을 수도 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다행히 나는 조금 이른 시간에 방문해서인지, 바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곧이어 백숙백반이 등장했다. 커다란 쟁반에 김치, 깍두기, 풋고추, 양파, 밥, 그리고 메인인 닭 한 마리가 푸짐하게 담겨 나왔다. 닭은 뽀얀 속살을 드러내며 쟁반 위에 놓여 있었는데, 겉보기에도 잡내가 전혀 느껴지지 않을 만큼 깨끗하고 신선해 보였다.

백숙백반은 10,000원이라는 합리적인 가격에 닭 한 마리가 통째로 나온다는 점에서 매우 만족스러웠다. 닭고기 자체만으로도 훌륭했지만, 함께 나온 밑반찬들도 모두 정갈하고 맛깔스러웠다. 특히 잘 익은 김치는 매콤하면서도 아삭한 식감이 좋았고, 깍두기는 닭백숙의 기름진 맛을 잡아주는 역할을 톡톡히 했다.

본격적으로 닭고기를 맛볼 차례. 젓가락으로 살코기를 살짝 떼어내는 순간, 닭이 얼마나 잘 삶아졌는지 알 수 있었다. 뼈에서 살이 스르륵 분리될 정도로 부드러웠고, 입안에 넣자마자 사르르 녹아내리는 식감이 일품이었다. 잡내는 전혀 없고, 닭 자체의 담백한 풍미만 가득했다. 굳이 양념장을 찍어 먹지 않아도 충분히 맛있었다.

닭백숙을 즐기던 중, 서비스로 나온 국물에 닭다리를 넣어주셨다. 이 국물 또한 닭의 깊은 맛이 우러나와 진하면서도 맑은 것이, 추운 날씨에 몸을 사르르 녹여줄 것 같은 따뜻함이 느껴졌다. 닭다리를 국물에 더 넣어 야들야들하게 익혀 먹으니, 또 다른 매력이었다. 닭 자체로도 훌륭하지만, 50년 세월 동안 쌓아온 비법이 담긴 이 국물 덕분에 더욱 풍성한 맛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기다리고 기다리던 ‘계란 넣은 칼국수’. 뚝배기에 팔팔 끓여져 나온 칼국수는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돌았다. 뽀얀 국물 위에 김 가루, 깨, 그리고 계란이 풀어져 고소한 풍미를 더하고 있었다. 면발은 쫄깃하면서도 부드러웠고, 국물은 닭백숙 국물과는 또 다른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닭 육수의 깊은 맛과 계란의 부드러움, 그리고 갖가지 고명이 어우러져 한 그릇을 뚝딱 비우게 만드는 마성의 맛이었다.
이곳은 혼자서도 부담 없이 방문하기 좋고, 바쁜 직장인들이 점심시간을 활용해 든든하게 한 끼를 해결하기에도 안성맞춤이다. 굳이 여럿이 모여야만 좋은 식당은 아니지만, 동료와 함께 와서 백숙과 칼국수를 나눠 먹는 것도 분명 좋은 선택이 될 것이다.
가격, 맛, 분위기 어느 하나 빠지지 않는 만족스러운 점심이었다. 50년의 세월이 담긴 이곳의 음식은 단순히 배를 채우는 것을 넘어, 옛 추억과 따뜻함을 선사하는 듯했다. 을지로에서 든든하고 맛있는 점심을 찾는다면, 망설임 없이 이 노포를 추천하고 싶다.